Echte Liebe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책 맨 앞 페이지에서 우릴 맞이하던,[각주:1] 하지만 한 땐 불온서적으로 소지만으로도 '빨갱이'로 낙인찍고 끌려갔던, 그래서 영화 '변호인'에서도 언급되던 바로 그 책, '역사란 무엇인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추천 서적 목록에도 올라와 있는 책이라 몇 년 전에 책을 빌렸으나 너무 오래된 책이고 쉬운 내용도 아니다 보니 몇 페이지 훑어보다 접었다.


  그러다 올해의 어느 날,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을 진열대에서 봤는데, 201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더라. 딱 보기에도 책 상태도 매우 좋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지난달에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살 때 이 책이 생각나서 겸사겸사 함께 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펼쳤다.



  지금에 와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처음에 이 책을 집어 들 때만 해도 이 책이 순전히 역사에 대한 책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1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은 생각대로였다. 특히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우리 역사를 볼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보통 책 소개 부분은 별도로 접어두곤 했지만, 이번엔 네이버 책에 있는 책 소개 글로 이 책의 1~4번 단락의 핵심내용 정리를 갈음하겠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는 것은 누구에게든 널리 회자되어온, 역사에 대한 카의 유명한 정의이다. 그러나 그 두 항목 중에서 카가 강조하는 것은 과거 자체 혹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역사담론과 역사지식을 생산하는 ‘현재의 역사가’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과거의 사실들을 대화의 장에 불러들이는 것은 현재의 역사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는, 과거는 현재의 역사가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따라 구성되며, 과거의 사실들이 어떠했는가보다는 역사지식을 생산하는 역사가가 현재의 사회와 현실에 대해서 어떤 문제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카는 역사가의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의 가치관은 결국 미래에 대한 전망과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과거를 돌이켜볼 때 인간은,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더라도,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발전해왔고, 그러한 진보의 과정 자체가 인간이 합리적 이성을 지닌 존재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따라서 미래에도 인간의 역사는 더욱 합리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진보할 것인데, 장차 과거가 되어 있을 현재의 사회가 더 민주적이고 더 평등한 사회로 진보해갈 것이라는 이 변화에 대한 신념이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성격을 결정하고,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인식 내용을 결정한다고 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개역판 역자 후기에서


[Yes24 제공]



  하지만, 막상 이 책에서 더 주목했던 건 이 책의 후반부. 5장과 6장을 읽으니 이 책이 달라 보였다. 단순 역사 서적을 넘어 당대 사회에 대한 종합적인 담론이랄까. 특히 서구 열강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갓 냉전이 끝난 후의 친소 성향 서구 지식인일 뿐이었다.[각주:2] 그가 보수진영을 비판하며 주장한 진보도 어디까지나 지상락원이상향일 뿐이었으니. 무엇보다 문명과 사상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며,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괜히 저자가 2판을 준비하며 이 책의 6장을 갈아엎으려 했던 게 아니었다.[각주:3]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건 지극히 어리석다. 이 책이 쓰인 1961년을 생각해보라. 한창 양 진영 간 대립이 첨예할 때이다. 게다가 그때만 하더라도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미국과 유럽이었으며, 아시아는 한낱 변방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위의 사유를 근거로 평가절하하는 건 마치 오늘의 우리가 90년대 사람들에게 왜 문자쓸 줄 모르냐며 타박하는 행위와 같다. 오히려 그 시대의 매우 중요한 논의를 담은, 그 당시 세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표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문득 저자가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현재를 과연 어떻게 바라봤을지 궁금하다. 특히 소련이 무너지고 다변화된 지금의 세계를 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2판을 준비하던 메모에서 제3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지만 지금의 세태까지 예상하진 못했을 거라 보긴 하는데.. 그건 그분께 너무 가혹한 가정이려나?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질문이겠다. 아무쪼록 완독 후 감히 감상문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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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7차교육과정 기준. [본문으로]
  2. 특히 p.108~109에서 스탈린의 피해자들 때문에 눈치보인다는 뉘앙스의 문구는 의도야 어쨌든 가슴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본문으로]
  3. 저자는 서문만 쓴 채 세상과 이별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