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신영복 - 담론
예전부터 저자의 명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꼭 한번 읽고 싶었던 책. 그래서 올여름 의욕적으로 달려들었으나, 글귀가 마음먹은 대로 눈에 썩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첫 강의만 읽다 접었고, 책장 속에서 먼지만 쌓이며 잊혀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1월 초가 되어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감상문까지 쓰고 나서 책을 다시 꽂으려는데, 책이 중구난방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책 분류도 할 겸 책장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보며 은연중에 뿌듯해하던 찰나,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꽤나 오만했던, 지금에 와선 창피한' 생각이 날 덮쳤다. '지난 몇 달간 이런저런 책 읽으며 뭔가 쌓은 게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 책.. 이제는 좀 읽히지 않을까? 이젠 좀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알 수 없는 오기와 오만함에 이끌려 책 표지를 다시 열어젖혔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과연 이번엔 다 읽을 수 있을까...?[각주:1]
그중에서도 특히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1부.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동양의 고전 학문들(시경, 주역, 논어, 노자, 법가 등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작년에 동 저자의 책 '강의'를 읽다 한문들에 치여 포기했던 전적이 있어 긴장했다.
우리 시대의 지성, 신영복의 삶과 철학!
신영복 교수는 1989년부터 거의 25년간 대학 강의를 하였다. 이제 그는
2014년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학 강단에 서지 않고 있다. 비정기적 특강을 제외한다면, 대학 강단에서 그를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대신 저자는 강단에 서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의 강의를 녹취한 원고와 강의노트를 저본으로 삼은 책 『담론』으로
대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전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강의》에서 ‘동양고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탐색을 거쳤다면, 이번 책에서 그는 ‘사색’과 ‘강의’를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합쳐냈다. 그리하여 동양고전
독법을 통해 ‘관계론’의 사유로 세계를 인식하고, 고전을 현재의 맥락에서, 오늘날의 과제와 연결해서 읽어본다.
또한
저자 자신이 직접 겪은 다양한 일화들, 생활 속에서 겪은 소소한 일상들을 함께 들려줌으로써 동양고전의 현대적 맥락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의》 이후 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훨씬 깊어진 논의와 풍부한 예화를 담아낸 이 책에서 저자의
고도의 절제와 강건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같은 저자의 책 '강의'에 비해, 올여름에 처음 읽었을 때에 비해 책장이 수월하게 넘어갔다. 저자는 각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각 학문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각주:2]을 하나하나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사상이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짚어준다. 덕분에 사상의 맥락이 잡혔고 조금 더 피부에 와닿았다. 게다가 1부 마지막엔 정리까지 해주시니 더욱 이해하기 쉬웠다. 이만한 동양 고전 정리서가 있을까.
그 외에 1부를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내용 혹은 혼자서 생각한 바를 아래의 글 상자 속에 키워드 위주로 취합하였다.
- 공부의 의미 : 머리에서 가슴까지, 머리에서 발까지. 결국 마음으로 느끼며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뜻.
- 현실과 이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는 것. -> 좌와 우, 이론과 실천 모두 함께 가야 한다.
- 영원한 진보도, 보수도 없다.
- 100% 옳은 학문이란 없다. 학문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 현재의 눈으로 그 시대를 판단하거나 그 시대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가져오는 것을 지양하자.
- 필자는 죽고 독자는 꾸준히 탄생한다.
- 민초의 정치학 부분을 읽다 보니 촛불이 떠올랐다. 만일 저자가 이 세상에 계셨다면 분명 언급하셨겠지.
- 추상력(복잡한 것을 간단히 압축하여 정리하는 것.)과 상상력(작은 부분에서 큰 것을 읽는 것)의 조화.
- 단순한 문사철(언어, 숫자 등)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인식(시, 서, 화) 필요. 세계 인식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진실'이 중요.
책을 읽을수록 동양 사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졌다. 이제 진짜 도덕경, 한비자, 논어 도전해보자...! 그와 동시에, 책 부분마다 다른 책에서 본 부분이 떠오르며 연결되었다.[각주:3] 여름에 잠깐 읽었을 땐 그냥 이 책의 내용만 생각했었는데, 몇 달 사이에 바뀌었네. 이게 관심의 차이인지 기본기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까지 책을 아예 헛되이 읽진 않았구나 싶어 은근히 뿌듯했다.
2부는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이라는 제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일종의 인생 담론이라 해야 할까. 2부에서는 저자가 겪은 각기 일화와 저자의 저서 등을 토대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술회한다. 전반적으로 느낀 점을 말하자면.. 먼저 그 상항을 그렇게 버텨내셨다는 게 정말 경이로웠다. 내가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진작에 성격 파탄자가 되었을 텐데...
근데 정말 중요한 건, 또한 희망이 없는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며 인간을 관찰하고 사랑했다는 점. 삶에 대한 통찰력이 정말 엄청나다. 속된 말로, 2부 읽으며 여러 번 '뼈 맞았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자연스레 기존에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이 흔들렸다. 정말 '큰 사람'이며 '따뜻한 어른'이었다.
물론 모든 부분에 감탄했던 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20장과 21장에서 거부감이 든 건 사실이다. 그래, 대부분 맞는 말이다. 그래도 머리에서 튕겨 나온다. 분명 몇 년 전이었으면 정말 감탄하며 봤을 내용이겠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에 지쳤다. 근데.. 정말 지쳤을까, 아님 성향이 바뀐 걸까.[각주:4]
그러나 이 부분만 보고 책 전체의 메세지를 매도해선 안 되겠다. 그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에 갇히는 것이라 본다. 비록 일정 부분에서 공감이 덜 되긴 해도 저자를 끝까지 따라가니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진짜 인본주의자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인간을 위한 마음은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생각(혹은 반성)해볼 여지가 있으리라.
2부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와 닿는, 그래서 지금도 머리에 맴도는 부분 몇 가지를 아래 글상자에 담아봤다.
- 야쿠자 죄수와 노인 죄수의 싸움. 말로 논쟁하는 것의 가치.
- 증오의 대상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초 감각에 의해 그릇되게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 특히 이 부분을 보며 반성 많이 했다. 난 그저 책만 읽고 있지 않았을까..?
1장에서 좋은 책은 필자가 죽어도 독자가 꾸준히 탄생한다 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정말 대단한 책이다. 완독한 지 보름이 넘은 지금까지도 메세지가 머리에 맴돌고 있을 정도로 큰 울림을 느꼈다. 감히 올해 읽은 책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만약 저자가 계셨다면 강연이라도 하실 때 찾아갔을 텐데, 이미 늦었기에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더 늦지 않아 다행이었고, 여러모로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좋은 말씀 해주신 저자에게 인사말을 올리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선생님, 늦게나마 이렇게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비록 먼 길 떠나셨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영원할 것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올봄에 읽었던 동양 고전 책이 떠올랐다. 두 분의 내공을 내가 감히 저울질할 순 없다. 하지만 책이 품은 특유의 느낌을 비유하는 정도는 가능할 듯하다.
올봄에 읽은 책은 '고전에 빠삭한 이사님이 회사 회의실에서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산전수전 겪은 큰 어르신이 따뜻하게 몇 마디 해주시는 책' 정도로 말해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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