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에리히 프롬 - 사랑의 기술 이야기.
1. 2012년의 어느날,
시험공부를 그만두고 복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친한 형네 자취방에서 술을 한 잔 마셨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연애 이야기가 나왔다. 나야 당시만 해도 변변한 연애 경험 한번 없었으니 듣고만 있었는데, 대뜸 책을 읽어보라는 거다. 그 형은 나름 긴 기간 동안 연애해본 사람인데, 연애 기술에 대한 책을 읽으며 새로운 걸 배운다고.
그렇게 책 몇 권을 추천받은 다음 날, 어제 들었던 제목 중 가장 짧고 기억에 남은 것부터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다. 근데 웬걸, 연애하는 데 이렇게 깊은 철학이 필요한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뭔가 깊은 내용의 알찬 책이기에 끝까지 쭉 읽었다. 하지만... 책을 덮자마자 내용이 신나 향처럼 신나게 날아갔다(...).
나중에 그 형이랑 다시 만났을 때 물어보니 형이 말한 건 '연애의 기술'.[각주:1] ㅇㅏ, 내 착각 때문에 정말 엉뚱한 책을 읽었구나... 그렇게 착각 속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2. 2014년의 어느날,
약 1년 후, 취업 준비를 갓 시작하던 시절, 지금까지 대학교에서 했던 걸 돌아보니 전공을 제외한 기초 교양이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전공을 제외한 교양서적을 읽은 게 많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에 몇몇 책을 직접 구매했다. 당시만 해도 거의 백지상태라 한꺼번에 여러 내용을 훑어볼 수 있는 콘서트 류의(...) 책을 주로 샀으나, 이 책은 다시 한번 읽고 싶어 직접 구매했다.
하지만, 내 게으름 때문에 한동안 책장에 처박혀있다가 책을 구매한 지 1년이 넘은 시점에서야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에 개인적인 풍파(...)가 몰아쳐 힘들어했던 시절이었기에 이 책이 더욱 생각났고, 차근차근 다시 읽어나갔다.
...뭐, 여전히 어렵더라. 읽은 내용의 대부분이 또다시 머리에서 증발했다. 그래도 처음보다 조금이나마 알맹이가 남았다. 모성애와 부성애, 자기애, 형제애 등등... 그땐 뭔 소린가 싶었던 것들이 다시 보였다. 특히 책 마지막 부분에 있는 프롬의 인생사와 연계되어 모성애와 부성애 부분이 눈에 유독 들어오더라. 그때 이 부분에 대해 한창 고민하던 시절이어서 그랬던 걸까..? 언젠가 다시 이 책을 펼치기로 기약하며 책장을 덮었다...
3. 2019년의 어느날,
재작년쯤부터였던가,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닐 땐 그냥 진이 빠져있었고, 회사를 나온 후부터 지금까진 다른 책들을 읽느라 이 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나마 '다시 읽어봐야 하는데...'라고 읊조리기만 했다. 그러다 지난 책의 독후감까지 다 쓰고서 뭘 읽어야 하나 둘러보던 찰나에 이 책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래, 지금이구나. 이참에 다 읽고 기록도 남길 겸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다시 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어떻게 읽힐지 궁금했다.
설마.. 안 읽히진 않겠지?
응 안 읽혀~
(....)
역설적이게도, 순수히 책 읽는 속도만 따진다면 이번 회차가 압도적으로 느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닌 깊이. 예전엔 그저 읽어나갔는데, 이번엔 몇 단락 읽다 보면 텍스트와 연결된 생각에 빠져들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텍스트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의 세월이 이 글귀들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읽으며 특히 눈에 들어온 문구 두어 개를 지금 당장 떠올리면.. '성적 만족은 사랑의 "결과물"',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환상"' 정도? 그 외에도 '자기애', '형제애', '합리적 신앙' 등등.. 조금 더 많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부성애, 모성애에 대한 부분과 프롬의 사랑사(史)는 다시 봐도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면 그걸 극복하지 못했을 텐데 프롬은 그 벽을 깼으니까. 저자 당신의 경험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용기'에 대한 글귀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책 후반부에선 사랑하는 법[각주:2]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중 인내, 용기에 관한 부분은 바로 전에 읽었던 '탁월한 사유의 시선'과 일맥상통했다. 아마 저자가 불교에 심취하여 동양적인 내용을 일정 부분 받아들였기에[각주:3]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4. 그리고, 지금.
블로그 초창기에 감상문을 이것저것 쓸 때부터 비록 아는 거 없이 무모하지만그 흔적을 짧게라도 남기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고 있으니 뭔가 케케묵은 숙제를 하나 해치운 듯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처음 접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한 번에 돌아보는 중간점(Way Point) 역할을 하기에, 지금은 흐릿해진 당시의 기억들까지 되는대로 그러모았다. 한 데 모아보니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싶다.
아마 당장은 아니고 몇 년 후에 또 읽을 듯한데 그땐 과연 어떤 부분이 눈에 들어오고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다. 일단.. 또 열심히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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