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재미없고 흔해빠진 이야기.
어떤 평범한 일요일, 한창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 - 독서실 - 집을 반복하던 날이었다. 마침 아버지께서도 서울로 파견오셔서 같이 살던 때였다. 그 날도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늦잠 자고 일어나 천천히 아버지와 함께 아점 한 끼 하러갔다. 평소와 같이 밥먹고 다시 방에 돌아왔는데, 대뜸 아버지께서 한 마디 하셨다.
- 니 내한테 뭐 숨기는 거 없나?
- 없는데요?
- 맞나..
- 네.. 왜요?
-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시며) 아침에 내가 이걸 주섰거든..
'...... ㅅㅂ'
그건 내 담배였다. 당시 난 흡연자였다. 대학생이 된 이래로 쭈욱 떨어져 살았으니 내가 조금만 노력해도 티가 나진 않았다. 그때까지 실제로 안 들켰고.. 물론 아버지께서 흡연자셨던 덕에 우리 가족이 모두 담배냄새에 상대적으로 둔감했던 영향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같이 살 땐 담배는 항상 독서실에 두고 다녔는데, 파견 끝날 때 되자 아들래미 공부하는 자리나 한 번 보자는 심산에 내 자리에 갔던 것. 난 설마 아버지께서 내 자리까지 찾아오실 줄 몰랐던 거지.
- 오늘 꿈을 꿨는데, 꿈에서 아버지가 아들 공부하는 자리에는 가봐야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가봤더니만 이게 나오네?
- .....
- 니 저번에 몇 차례 물어봤을 때 안핀다 그러디만, 왜 애비를 속이노?
- .....
- (뭐라뭐라...) 앞으로는 애비 속여묵지 마라이.
- 네
- 언제부터 폈노?
- 5년 정도 됐네요.
- 이거 우짤꼬 하다가 그냥 말로 하는기다. 나중에 직장다닐 땐 몰라도 공부할 땐 담배 몸에 안좋다. 끊어라 알겠나.
- 네
- 할 말 다했으니 니 볼일 봐라.
- 미용실 좀 갔다올게요~
- 그래.
머리 다듬고 집에 오면서, 평소 피던 마일드세븐 1미리짜리가 아닌 마일드세븐 라이트(6미리 짜리)를 사서 그 자리에서 3연속 줄담배를 때웠다. 알고도 그냥 조용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과 이 나이 먹도록 이런 거 하나하나 터치받아야 하냐는 생각 등등을 하며 그저 필터만 빨아제꼈다.
그러다 마지막엔 담배를 진짜 끊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다음주면 아버지께서 다시 돌아가시고, 그 다음부턴 혼자서 살게 된다. 앞으로 예전보다 조금 더 조심하고, 집에 내려가지 않는 이상 담배를 계속 펴도 괜찮았다. 한 번 걸렸으니 앞으로 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못할 건 없으니. 그런데 그러기 싫었다. 이 나이먹고 이런 것까지 간섭받는 것도 엿같은데 지금처럼 또 숨어가며 피려니 구차하고 처량하며 지랄같았기 때문. 그래서 이 참에 담배랑 작별하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한 대 더 핀 다음 그 담배는 버리고, 그날 밤에 독서실에서 안면 튼 친구한테 담배를 얻어 피고선 담뱃불을 껐다.
그렇게 금연을 시작한 후 6일 쯤 되었을 때였다. 지난 며칠 간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서 아무것도 못하다가 그나마 조금 나아졌을 때였다. 방에 잠깐 들렀다 다시 독서실에 가는 길이었는데, 길바닥에 생생한 담배 한개피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분명 '이젠 저 놈한테 더이상 안 흔들리지!'라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정신차리니 어느새 그 담배를 주워서 입에 물고 있었다 -_-... 며칠만에 진짜 담배를 빨아들인 것. 근데 이상하게도 담배에서 아무 맛이 안 났다. 보통 며칠 담배를 안 피다 다시 피면 아무리 적은 양의 니코틴이라도 어지럽기 마련인데, 그날은 정말 아무런 느낌도 안 들더라. '이거 뭐지???'라 생각하며 다시 가던 길 갔다. 이젠 이런 실수 다신 안한다며...
다행히도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담배가 진짜 내 마지막 담배가 되었고. 5년 반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담배가 왜 아무 맛이 안 났는지 궁금하다. 신기하단 말이지..
이젠 금연기간이 흡연기간보다 더 길다. 사진은 금연기간과 흡연기간이 같아진 날 찍은 기념사진. 꼴에 기념이라며 집 근처 담배가판대를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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